
2021년 1월 6일,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코로나로 세상은 얼어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도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곳곳의 무료급식소들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한 끼 식사조차 걱정해야 하는 분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나마 도시락을 나누어 드리기로 했습니다. 도시락을 나누던 첫날, 109명의 노숙인 손님들이 찾아와 도시락을 받아 가셨습니다. 그렇게 명동밥집은 시작되었고, 그 작은 시작에 주님의 따뜻한 은총이 함께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5년이 흘러 이제 명동밥집은 하루 평균 800~900여 명이 찾아오는 무료급식소가 되었고, 지난 25년 12월 28일에는 마침내 실내 공간을 마련하여 첫 실내 배식을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운동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던 지난날들이 주님의 은총 속에 한 걸음씩 이어져 왔습니다. 109명으로 시작된 손님은 2026년 6월까지 약 64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숫자로는 헤아릴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연과 감사의 마음은 오직 주님만이 온전히 아실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노숙인들이 모이면 인근 상인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압력이 있었고, 명동성당 경내 출입에 대한 염려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손님들의 공격적인 언행으로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위협을 받는 일도 있었고, 멱살을 잡히며 욕설을 듣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사업을 우리를 통해 이루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명동밥집이 있기까지는 봉사자님들의 땀이 있었습니다.
명동밥집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야간에 노숙인들을 위한 간식 배달을 도와주셨던 분들, 힘들고 고되다고 꺼려 하는 요리와 설거지를 도맡아 매주 봉사해 주시는 분들, 먼 지방에서 정기적으로 봉사를 오시는 분들, 봉사자가 부족하다는 말 한마디에 기꺼이 오셔서 하루 종일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신 분들. 그분들의 땀과 미소 속에서 저는 천사의 모습을 봅니다.
후원자분들의 사랑 또한 저로 하여금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불교 신자이시면서 명동밥집을 직접 와서 보시고는 5년 동안 큰 후원과 지원을 해주고 계신 어느 기업인, 할머니의 손톱을 깎아 드리고 받은 용돈을 모아 보내 주는 예쁜 공주님, 본인도 어려운 형편 가운데에도 청소 일을 하시며 모은 돈을 후원해 주시는 자매님. 그 모든 손길이 곧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기억하고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명동밥집을 사랑하고 응원해 주셨던 故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 물심양면으로 명동밥집을 지원해 주시는 오승원 본부장 신부님, 허리디스크로 수술까지 받으시면서도 손님들을 위한 국을 끓여주시고 계시는 백광진 신부님, 명동밥집 초창기를 함께 고생하시며 시스템을 정립해 주신 김정환 신부님, 바쁘신 가운데도 늘 봉사를 오셔서 함께해 주셨던 조원필 신부님, 명동밥집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봉사를 해주시고 계시는 나승구 신부님, 유환민 신부님과 정재우 신부님, 밥집일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시고 도와주셨던 차바우나 신부님, 천막 특강을 통해 봉사자들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여러 신부님들, 함께 기도해 주시고 참여해 주신 많은 신부님과 수도자분들까지. 그리고 명절과 공휴일도 없이 함께 수고해주고 있는 명동밥집의 직원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손님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 속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작년 서울역에서 쓰러져 돌아가신 혹부리 할머님입니다.
오른쪽 얼굴에 큰 혹이 있으셔서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셨지만, 마음만큼은 매우 따뜻하신 분이셨습니다. 오실 때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니다" 하시며 사탕 한 개를 꼭 쥐여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분들을 통해 오히려 더 큰 사랑과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운동장에 깔렸던 색 바랜 초록색 매트와 파란 간이 테이블, 바퀴 달린 천막, 봄이면 담장 옆에서 흐드러 지게 피던 살구꽃, 축대 위에서 묵묵히 밥집을 지켜보았던 아름드리 은행나무, 손님들이 좋아하시는 계란 프라이와 카레 냄새도 모두 추억이 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선명하게 남을 기억은 땀 흘리며 함께 웃고 기도하고 봉사하던 봉사자님들의 선한 얼굴일 것입니다.
저는 이제 며칠 후 이 정든 자리에서 정년퇴임을 합니다. 떠나는 제 뒷모습이 손님들과 봉사자님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명동밥집에서의 모든 시간이 주님의 은총이었고 가톨릭 신자로서 제 인생의 큰 축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명동밥집은 우리의 밥집이 아니라, 주님께서 차려주신 사랑의 식탁이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이 식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기억해 주시고, 응원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